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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필독

정액검사 정상의 진실, 그리고 현미경이 알려주지 못하는 것

 

정액검사는 정자를 현미경으로 보는 검사입니다. 정자의 존재여부, 수가 충분한지, 살아있는지, 움직이는지, 모양이 괜찮은지를 보는 검사입니다. 현미경으로는 딱 그 정도 수준의 정보를 얻게 됩니다. 물론 가치있는 정보입니다.

 

자, 밖으로 나가 지나다니는 사람을 보십시오. 멀쩡하게 생겼고, 잘 걸어다니고… 그 정도가 보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정말 속까지 멀쩡한지, 정신은 똑바로 박혔는지, 그런 것은 눈으로 보아 명확히 알수는 없습니다.

정액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미경 검사가 정자의 모든 것을 다 알려주지는 못합니다. 63빌딩 위에 올라가 사람들의 걸어다니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정도랄까…

 

피로에 찌든 정상?

32세 명순(가명) 씨는 결혼한지 만 3년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결혼 후 8개월쯤 임신되었었으나 심장 소리를 듣기도 전에 유산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1년이 지나도 임신이 되지 않아 전문 병원을 찾아 각종 검사를 받아봤으나 임신이 안 될만한 원인이 딱히 발견되지는 않았습니다.

 

배란유도제를 3주기 동안 복용하며 시도했으나 안 되었고, 이어서 인공수정을 두 번 해봤으나 안되었으며,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체외수정(시험관)도 한 번 해봤으나 또 안 되었습니다. 이제 그녀의 남편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남편은 애주가였습니다.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신다고 하지만 본인 스스로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집에서 저녁식사를 할 때도 맥주 1병씩은 꼭 마셨습니다. 아침에 무척 힘들게 일어났으며, 저녁에 들어와서는 피곤하다며 소파에 누워 TV만 보았습니다. 피곤하다며 부부관계도 잘 갖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담배도 피우고 있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하루에 1갑씩.

 

남편은 자신의 문제 때문에 임신이 안 되는 것은 아니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임신을 한 번 시켰던 적이 있으니 말입니다. 이 확신은 정액검사를 받은 이후에 더 강해졌습니다. 의사로부터 ‘정상’이라는 판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정액검사 결과지를 보았습니다.

 

정액의 양은 2.5㎖, 정자의 숫자는 1㎖당 1,800만 마리, 움직이는 정자의 비율은 40%, 정상 모양 정자의 비율은 4% 수준이었습니다. 정상은 정상이었습니다. 2010년 세계보건기구(WHO) 기준의 참고치 범위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커트라인을 간신히 턱걸이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정액검사참고치. 세계보건기구(WHO)의 정액검사의 참고치는 지금까지 다섯 번 바뀌었음

 

정상이라는 말의 의미?

진료실에서 부부에게 정액검사 결과가 어땠는지 물으면 “평균 이상이래요”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사는 그냥 “기준치 넘었어요”라고 말했던 것인데 그것을 ‘평균 수치 이상’으로 알아듣는 것이지요.

 

의사들이 평균 수치로 얘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되는 절단점(cutoff point)은 평균 수치로 정하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수학 시간에 아래와 같은 분포 곡선을 배웠던 기억이 있을 겁니다. 중간이 평균치고요, 정상-비정상을 나누는 점은 하위 5%를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정자평균치기준치는 평균치가 아니라 하위 5%의 수치임

 

그렇다면 위에서 예를 들었던 명순 씨의 남편의 경우는 어느 정도의 성적이었나요?

정액 양은 2.5㎖, 정자의 숫자는 1㎖당 1,800만 마리, 정자의 운동성은 40%, 정상적인 모양을 갖는 비율은 4% 정도였습니다. 이는 하위 5% 기준선을 가까스로 넘은 수준이었습니다.

 

‘정상범위’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자연임신이 가능한 수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 담긴 뜻을 오해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평균’이라는 말도 아니고 ‘최적’이라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정상범위에도 A급, B급이 있고, 또 D급도 있습니다. F면 낙제고요.

 

명순 씨 남편은 이 기준으로만 보면 정자의 숫자나 운동성, 그리고 모양이 하위 10% 수준인 D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임신을 못하는 수치라는 뜻은 아니지만, 임신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가 될 수는 있습니다. “나는 이상 없고, 나 때문은 아니니 나는 술 마시고 담배 피워도 문제 없다”고 말할 수준은 결코 아니라는 거죠. 바로 그 때문에 임신이 더뎌질 수도 있는 걸요.

 

대학입시 때 공부 열심히 안하면 재수, 삼수, 사수하게 되는 것처럼, 정자의 성적도 하위권이면 재수, 삼수를 넘어 칠수, 팔수도 하게 되는 겁니다. 정상인데 하위권, 대학 갈 수 있지만 쉽게 가지는 못하는 하위권으로 비유해본 겁니다.

 

 

출처=http://humupd.oxfordjournals.org/content/16/3/231.long

 

 

정자가 지녀야 하는 능력은 여러 가지입니다.

 

정자가 발사되는 곳은 자궁이 아니라 질 내부입니다. 이곳은 산성 환경입니다. 정자는 산성에 취약합니다. 알칼리성을 띄는 정액은 정자를 보호해주므로 정액이 많이 나올수록 정자는 더 잘 보호됩니다.

 

그래서 정액의 양도

중요한 겁니다

정자는 잽싸게 헤엄쳐서 자궁의 입구인 자궁경부를 통과하여 자궁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냥 뭐 수영장 같은 데를 헤엄치는 게 아니에요. 산 넘고 물 건너 난자가 있는 곳까지 헤엄쳐가야 합니다. 헤엄을 잘 치려면 에너지가 세고 모양도 좋아야지요. 머리의 크기는 적당하고, 유선형으로 생기고, 꼬리의 길이가 적당할 수록 헤엄을 잘 치겠죠.

 

정자가 1초에 25㎛ 이상을 헤엄칠 수 있으면 일단 전진 능력을 갖췄다고 판정합니다. 즉 1분에 적어도 1.5mm 정도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거죠. 보통은 1분에 3mm 정도 전진합니다. 정자는 꼬리를 1천 번 치면 1cm 정도 전진한다고 합니다. 난자를 만나러 나팔관 팽대부까지 대략 20cm를 헤엄쳐가려면 대략 2만 번 정도 꼬리를 쳐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구력이 있어야지요.

 

정자는 여성의 자궁과 난관을 통과하면서 옷이 벗겨져야 합니다. 남녀가 옷을 입은 채 관계를 가질 수는 없듯이, 정자도 옷을 벗어야 해요. 그래야 몸이 가벼워지고 난자를 향해 미친 듯이 헤엄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정자의 ‘수정능획득(capacitation)’이라고 합니다. 그게 잘 안 되는 정자들도 있어요.

 

 

정자의 수정능획득
(이미지 출처=http://keytoconceive.com/)

 

 

한 번에 발사된 수억 마리의 정자 중에 난자에게 도착하여 그 주변에 달라붙는 정자는 수백마리에 불과합니다. 거기까지라도 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아요.

 

그리고 들이댄다고 난자가

다 받아주지는 않습니다

막상 난자에게 도착하면 난자의 표면을 파고들어갈 힘이 있어야 합니다. 난자의 표면에는 과립막 세포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서 열나게 삽질을 해야 돌파를 할 수 있거든요. 머리를 들이밀고 힘차게 꼬리 치는 물리적인 힘도 필요하고, 난자의 표면을 녹여낼 수 있는 화학적인 힘도 필요합니다.

 

정자의 머리 앞 부분에는 아크로좀이라는 구조물이 있는데, 정자의 머리가 난자의 표면에 닿으면 여기서 난자를 녹여내는 화학 물질이 방출됩니다. 이것을 아크로좀 반응이라고 합니다. 이 아크로좀 반응이 제때에 제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수정이 안 됩니다.

 

 

ⓒhttp://legacy.owensboro.kctcs.edu/

 

 

그런데 어떤 정자들은 난자에 닿기도 전, 헤엄쳐오는 도중에 아크로좀이 열려 화학물질을 미리 발사하기도 합니다. 어이없죠. 재밌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영국 퀸스대학 연구팀의 연구결과, 발기부전 약으로 쓰이는 비아그라가 정자의 운동성을 좋게 하기는 하는데, 어이없게도 아크로좀 반응은 너무 빨리 유발시켜 수정능력을 상실하게 할 수 있다고 하네요.

 

정자 DNA는 현미경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는 정자의 외형과 물리 화학적인 에너지에 관한 얘기였습니다. 정자에게 필요한 기능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이 정자의 하드웨어 측면이었다면, 정자에게도 소프트웨어가 있다는 것을 알자고요.

 

정말 더 중요한 것은 정자가 가지고 있는 유전정보, 즉 DNA의 온전성(integrity)입니다. DNA는 30억 쌍의 염기서열을 갖는 사람의 설계도이며 정보 파일입니다. 중요 파일이 깨지면 컴퓨터가 멈추듯이 배아세포의 DNA가 깨지면 배아는 발달하다가 중간에 멈춥니다.

 

세포의 소프트웨어도 버그(bug)가 생길 수 있어요. 그 버그를 고칠 수 있는 디버깅(debuging) 능력은 인체에 내장되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과로, 스트레스, 노화, 술, 담배, 나쁜 음식 등은 디버깅 능력을 감소시킵니다.

 

정자에게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DNA가 손상된 정자라도 겉보기는 멀쩡하고, 헤엄도 잘 치고, 난자를 뚫고 수정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계도가 손상되었기 때문에 발달하다가 멈춥니다. 즉 착상 장애와 초기 유산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관련 논문1, 관련 논문2) 정자와 난자 모두 DNA가 온전해야, 유산이 되지 않고 온전히 배아가 발달할 수 있습니다. 부부 모두 염색체 검사에서 문제가 없다고 해도 때때로 손상된 DNA를 가진 정자와 난자는 출현할 수 있습니다.

 

현미경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

정액검사는 정액을 받은 뒤 대략 30분 정도의 시점에서 현미경으로 정자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정자의 숫자, 모양, 움직임 등 외형적인 면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요. 현미경으로 보는 정액검사는 면접 정도의 정보인 셈입니다. 큰 하자가 있는지 없는지 정도만 아는 겁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 쓱 보세요. 사람답게 생기고, 잘 걸어 다니지만, 그 정신과 에너지가 어떠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정액검사를 할 때 400배율 현미경을 씁니다. 아래 동영상은 1,000배율 현미경으로 본 동영상입니다. 이것으로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은 알 수 없겠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현미경으로는 정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있을 수 있는지(생존력), 정자가 얼마나 멀리까지 달려갈 수 있는지(지구력), 정자가 얼마나 힘이 센지(돌파력), 정자의 DNA가 얼마나 온전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액검사에서 정상이라는 얘기만 듣고, 그리고 그 수치가 기준치를 갓 넘긴 것일지도 모르는데, 자신은 이상 없다, 문제없다면서 막 살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지금까지 좀 어렵고도 자세한 이야기를 한 이유를 잘 생각해주십시오. 간혹 너무 단순하게만 생각하시는 남편분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부부끼리 서로 탓하라고 쓴 글은 아닙니다. 서로 돕자고 쓴 글입니다. 취지를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됐고, 다 치우고

시험관 하면 되잖아?”

시험관(체외수정) 시술이 돕는 것은 정자와 난자를 몸 밖으로 채취하여 미팅(수정)시켜서 자궁 안에 넣는 것까지입니다. 시험관 시술이 정자와 난자의 질을 높여주는 건 아닙니다. 좋은 씨가 만나야 끝내 결실도 할 수 있습니다.

 

시험관을 하면 무조건 다 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래 표는 ‘2012년도 난임부부 지원사업 결과 분석 및 평가’라는 제목의 정책보고서에 나온 표입니다. 정부가 난임부부에게 시험관(체외수정) 시술을 지원해주고 그 결과를 보고받은 것입니다. 어찌 보면 가장 진실한 보고서일 수 있습니다.

 

 

2011년 한 해 동안 정부지원을 받아 시험관 시술을 받았던 부부들의 출산 성공률은 25%였습니다. 즉 시술 4번 중 1번입니다. 40세가 넘은 부부들은 10% 수준이었습니다. (위의 표에서 ‘임신율’은 임신되었으나 유산된 경우까지를 포함하는 수치입니다.)

 

혹시라도.. 정자만 주면 다 될 것으로 생각하지만은 맙시다. 시술에만 의존하지는 맙시다. 시술을 받더라도 더 좋은 정자를 미리 잘 준비해두면 성공률을 높일 수 있습니다. 부부가 함께 한 마음이 되어 사랑하고, 노력하면 정자를 개선할 방법이 많답니다.